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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동북각루/역사와 배경/수원전망좋은곳/수원경치좋은곳/당일드라이브/당일치기여행 by 위켄드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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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방화수류정은 화창한 날도 좋지만, 작은 연못을 바라보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비오는 날 산책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수원화성(水原華成)의 네 개의 각루 중 동북각루의 이름이 방화수류정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조선후기 에 건립된 수원 화성의 동북쪽 누정. 각루. 보물.

방화수류정은 수원 화성의 네 개의 각루 중 동북각루의 이름이다. 이것은 1794년(정조 18) 수원 화성(사적, 1963년 지정)을 축조할 때 화성의 동북쪽에 군사지휘소부로 만들었던 각루로,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龍淵)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龍頭) 위에 있다. 각루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중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고 하며, 현판의 글씨는 근대의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이 썼다. 2011년 3월 3일에 보물로 지정되었고, 수원시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원 방화수류정 [水原訪花隨柳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3월 3일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9월 4일 진시(辰時)에 터다지기 공사를 착수하여 10월 4일 묘시(卯時)에 정초를 한 후 기둥을 세웠고, 7일 오시(午時)에 상량하였으며, 10월 19일에 완공하였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연설(筵說)에는 1795년(정조 19) 2월 14일에 화홍문을 경유하여 방화수류정에 임금과 신하가 거동한 기록이 있고, 1797년(정조 21) 1월 29에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활쏘기를 하고 화성성역의 노고를 치하한 기록이 있다. 방화수류정은 1848년(헌종 14)에 팔달문, 장안문과 함께 중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화성성역의궤』 동북각루내도(東北角樓內圖)와 1907년(강희 1)에 독일인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가 촬영한 사진에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계단이 2개소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계단이 1개소로 되어 있는 것 외에는 대체로 원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화성 성곽의 동북쪽 모퉁이에 솟아있는 바위 위에 자리한 방화수류정은 원래 화성의 동북쪽 군사지휘부인 동북각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곽 아래에 있는 용연 등 경관이 좋은 위치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군사시설로만 활용하지 않고 경치를 조망하는 정자의 역할도 겸하였다. 이 건물은 형태가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주변 경관과 어울림이 뛰어난 건물로, 조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잘 반영하고 있다.
건물은 2층 구조이며, 평면은 불규칙한 지형과 바위와의 조화를 고려하여 ㄱ자형으로 지었다. 상층은 사방이 트인 누각으로 동서 세 칸 중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북쪽에 한 칸, 남쪽에 반 칸의 마루를 물리었다. 또 서쪽의 한 칸은 길게 2칸으로 늘렸다. 특히 용연 방향으로는 작은 쪽마루 툇간을 달아내어 평난간을 둘렀다. 하층 벽체는 아래에 돌을 쌓고 그 위는 전돌로 쌓았으며, 성 바깥쪽으로 총안을 뚫었다. 이 건물은 평면의 형태가 복잡한 만큼 지붕도 단순하지 않다. 팔작지붕을 ㄱ자로 꺾어서 짜고 다시 툇칸이 생기는 부분마다 작은 지붕을 덧붙여 놓아서 용두 위에 우뚝 솟은 건물의 모습은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각기 달리 보인다. 지붕의 한복판 위에는 절병통을 세웠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를 설치하였다.

주변 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정자의 기능을 고려하여 조영된 동북각루로, 주변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히 사용한 2층 누각 형태의 이 건물은 다른 정자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방화수류정 특징

방화수류정은 정조(正祖)와 관련된 많은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각루로서 군사적 목적은 물론 정자로서의 기능을 고려하여 조영함으로써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독특한 평면 및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18세기 정자 건축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사진을 더 감상하고 싶다면 아래 포스팅에서 감상할 수 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 비오는날 가기 좋은곳/ 야경 좋은 곳

오늘 아침은 비가오는 창밖을 보니, 수원화성에 있는 방화수류정이 생각이 났다. 이곳은 비오는날 가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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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화서문

수원화성(Hwaseong Fortress)과 화성시(지역명칭)과 아직도 혼동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 하고 싶다.

수원읍이 수원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수원부(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이름을 화성군으로 변경했는데, 이 화성이란 이름은 다름아닌 수원시(구 수원읍)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水原華城)에서 따 왔다. 따라서 한자도 같다. 수원군청 이름 역시 화성군청으로 바뀌어 1970년 오산읍으로 이전할 때까지 수원시 내에 남아있었다.
1995년 도농통합 대상에서 배제되어 수원시와 통합되지 않았고, 2001년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화성시라는 명칭과 달리 화성이 화성시가 아닌 수원시에 있어서 헷갈려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정작 당사자들인 수원시민 및 화성시민 대부분은 이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다만 타 지역에서 출신지역을 소개할 때 동부 지역의 경우 위의 이유로 그냥 수원 산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옛 수원군 수원읍이 1949년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될 때, 시와 군이 분리되면 둘 중 하나의 명칭을 바꿨던 당시의 관행에 따라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수원의 전통적인 상징이자 옛 명칭인 화성에서 이름을 따와 '화성군'으로 개칭한 데서 출발한다. 수원화성 축조 이후 수원유수부를 '화성유수부'로 개칭되어 지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후에 다시 수원부로 격하되었다가 1895년 수원군으로 개편되었다. 1963년 수원시의 행정 구역이 대대적으로 확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당시의 화성군은 화성 성곽에 좀 더 근접한 곳(정자동, 송죽동, 조원동, 매탄동, 권선동 등)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즉 그때만 해도 화성군에서 화성 성곽을 관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볼 수는 있었다. 이것이 시 승격 이후에도 현재까지 '화성시'란 이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만 역사적으로 수원화성이 축조되기 전의 수원읍성은 현재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에 위치했다.
조선정조가 구 수원읍치를 헐고 조성한 것이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융릉)이며, 수원화성을 축조하여 이를 새 수원읍치로 삼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수원화성은 수원시에 있고, 구 수원읍성은 화성시에 위치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

 참고로 수원읍성 유적은 경기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원시-화성군(시)의 명칭 부여 방식과 유사한 사례로 
대구시-달성군(달성은 대구시내에 위치했던 성곽), 경주시-월성군(월성은 경주에 있는 신라 왕성의 이름), 금성시-나주군(금성은 나주성의 별칭이자 나주의 고호)이 있다. 참고로 이들은 훗날 각각 월성군→경주군, 금성시→나주시로 명칭이 환원되었고 1995년 도농통합당시 경주시, 나주군과 통합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Hwaseong Fortress)

수원화성(水原華城)은 조선 정조 시기에 지은 수원시의 성곽 건축물과 이를 중심으로 한 계획도시이다. 오늘날에도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차례의 자연 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것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나, 수원화성은 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수원화성 정식 명칭

정식 명칭은 수원화성(水原華城)으로, 약칭으로 수원성(水原城), 또는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화성이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이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역사적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때도 수원화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수원군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름만 따서 이렇게 된 것이다.

실제로 시와 군이 분리될 경우, 특히 그 군의 전통적인 중심지가 분리될 경우 지명으로 시 지역과 군 지역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기존 지명에서 한 글자를 바꾸거나(청주시 - 청원군 등), 고지명(충주시 - 중원군 등) 혹은 유적 이름(경주시 - 월성군 등)을 쓰는 방식을 썼다. 다만 전통적인 중심지가 아닌 곳이 시로 분리되는 경우 시 쪽이 새 이름을 지었는데 대개 시가 될 지역의 읍면명을 땄다(사천군 - 삼천포시 등).

실제로 수원과 화성은 같은 고을로 수원화성 축조 전까지 수원부(수원도호부)의 원래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는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일대였으나 바로 이 곳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조성하면서(현륭원, 현재의 융릉) 기존 읍치를 밀어버리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읍치를 이전한 것이다. 또한 수원부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華山)'은 수원 고을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를 본따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짓게 된 것이다. 1793년 수원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부사를 '화성유수(留守, 오늘날의 수원시장)'로, 수원도호부(수원부)를 '화성유수부(화성부)'라 불렀다. SBS 드라마 은실이에서는 이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상의 행정구역 화산군이 등장한다.

정조가 장자의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에서 따서 이름지었다고도 한다. 이 내용은 화성시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것인데, 화성시에서 수원화성이 시명의 유래라고 명시하지만 않았을 뿐, '수원부 읍치와 현륭원을 위호할 성곽의 터를 둘러보면서'라는 내용이 앞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성곽이 바로 수원화성임을 알 수 있다.

군사적으로도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치성[6]의 활용으로, 성벽 전체 구간에 치성을 갖추어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게 사각없이 서로를 엄호할 수 있는 성형 요새의 삼각형 포루(砲樓)다.

다만 세간에 퍼진 화포에 대비하여 성벽을 낮게 쌓고 뒤쪽에 언덕을 덧대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낮다. 이런 방식은 내탁외축이라고 하여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전통의 축성방식이다. 오히려 이렇게 안 지은 성을 찾는 게 어렵다. 당시 조선은 화포에 대비하여 특별히 새로운 설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성벽이 화력을 견디지 못해 성형요새가 등장하는 유럽이라면 모를까, 19세기 이전에 화포로 성벽을 완전히 때려부수는 것은 대형 화포 사용 비중이 극도로 낮은 동아시아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껏해야 성첩(성 위에 병사들의 엄폐물로 쌓은 담장)을 무너트리거나 외벽을 일부 파손해서 기어올라갈 만한 틈을 만드는 게 한계였다. 평지에 쌓은 전축성의 경우엔 홍이포쯤 되는 화포로 집중 사격하면 벽 일부를 뚫을 수 있긴 했지만, 그런 성은 다중성벽이 기본이라 효율적인 짓은 아니었다.

성벽 높이도 삼년산성 같은 삼국시대의 거대 성벽이나 해외의 거성에 비교하여 낮은 것이지 조선시대의 읍성치곤 그렇게 낮지도 않다. 수원화성의 성벽이 낮은 직접적인 원인은 예산 부족이다. 원안은 25척의 높이를 가진 성벽을 쌓는 거였는데 예산이 딸려서 20척 높이로 낮춰 쌓았다고. 사실 수원화성은 조선에서 중국식 성곽 시설을 도입하여 쌓은, 기존에 없던 성곽 건축의 시제품으로서 가치가 높은 것이지 군사 요새로서는 여러모로 부실한 점이 많다. 치성이 잘 갖춰있긴 해도 다중성벽에 천연 해자를 갖춘 진주성, 평양성이나 지금 가도 토나오는 험지에 지은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성벽 자체가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점을 들어 동양 성곽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로 쌓았으며, 망루 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화공을 위한 장치와 화재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되어 있으며, 성벽 뒷쪽에 파낸 흙으고 둔덕을 쌓아 약식이나마 대포에 대한 대비도 되어있는 등,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형태다.

특이점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정문이 아니다.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 일반적으로 동북아에서는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화성에서는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임금이 들어오는 문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안문은 팔달문보다 크다.

 

 

 

화서문 성곽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정조, 《정조실록》 15년(1791)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한 이유와 유사하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며 철저하게 서로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준 것이 이 화성이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8]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한다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은, 바로 이들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인 셈.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9]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 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다. 성벽의 길이로 따지면 한양도성의 총 길이가 약 18.6㎞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총 길이가 약 5.5km이다. 또 화성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 이 시기에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 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리 일대에서 수원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다. 거기다가 도로 공사를 장려하지 않는 조선의 교통망을 생각하면...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수원 화성 성곽의 야경

 

수원화성은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마지막 공성전이 벌어진 장소다.
그것도 현대전이었다. 이전 성들과는 달리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지만 정작 조선시대 내내 수원화성이 실전에서 방어에 활용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에서도 비껴갔고 구한말 의병들은 일본군 상대로 게릴라전 형태의 투쟁을 했기 때문에 공성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6.25가 터지면서 수원화성은 처음으로 현대전에 방어용으로 쓰이게 된다. 문제는 수원화성은 처음 쌓을 당시 기준에는 가히 우주방어급 요새로 지었지만 6.25는 20세기 중반에 벌어진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북한산성과 더불어서 수원화성에도 대공포를 설치하고 요새화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둘 다 현대전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다.
하지만 개전 후 사흘만에 북한군에게 서울을 함락당하고 이후 한강방어선도 뚫린 상태에서 미군이 증원군으로 올 때까지 어떻게든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야만 했던 국군은 수원화성을 방어요새로 활용해서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하여 수원화성에서 북한군의 T-34 한 대를 파괴하고[12] 북한군을 하루 정도 수원화성에 붙잡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이튿날 T-34의 포격에 장안문과 성벽 일부가 파괴되고 국군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성 밖으로 탈출하여 후퇴했다. 결국 고폭탄 같은 현대적인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쌓은 수원화성은 전투가 발어지자 고작 하루만 버티고 북한군에게 함락당한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남한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성전이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사진을 더 감상하고 싶다면 아래 포스팅에서 감상할 수 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 비오는날 가기 좋은곳/ 야경 좋은 곳

오늘 아침은 비가오는 창밖을 보니, 수원화성에 있는 방화수류정이 생각이 났다. 이곳은 비오는날 가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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